패밀리게시판 CF와 性
2012-07-20 15: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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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가 된 언더웨어
진 시장에서의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캘빈은 1982년, 드디어 언더웨어 시장에 뛰어들었다. 먼저 남성 언더웨어를 출시했는데, 타 제품보다 고가에 판매되었지만 대성공을 거두었다.
광고는 우선 올림픽 장대높이뛰기 선수였던 톰 힌티너스(tom hintinaus)가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우람한 근육과 섹시함을 한껏 발휘한 것을 선보였다<광고 4>. 특히 버스 대합실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은 붙여 놓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훔쳐가는 기현상을 빚기도 했는데, 이는 캘빈 클라인의 인기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그리고 남성용에 이어 여성용도 출시되었는데 이러한 언더웨어는 캘빈 클라인이 거둔 성공의 정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캘빈 클라인의 언더웨어는 미국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특히 그녀의 딸인 마시 클라인은 “남자와 잘 때마다 그 남자의 팬티에 새겨진 아빠의 이름을 봐야 한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생각해 보라. 분위기 잡고 남자와 뜨거운 밤을 즐기려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름을 남자의 팬티에서 보게 된다면 마치 그의 아버지가 야단치는 듯한 느낌을 갖지는 않을까?
이처럼 캘빈 클라인의 언더웨어는 수많은 청춘 남녀의 ‘유니폼’이 되어 판매의 수직상승을 가능하게 했는데, 1985년에는 마이클 j. 폭스 주연의 <back to the future>에 소개되면서 이윽고 타깃들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기호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의 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팔리는 브랜드가 되기 위해서는 그 브랜드는 하나의 기호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캘빈 클라인의 언더웨어는 이 주장에 가장 적합한 샘플 케이스가 아닌가 싶다. 요즘처럼 성이 개방된 시대에는 언더웨어는 더 이상 ‘언더’가 아니고 패션의 일부분로서, 그의 의도대로 소비자들이 그대로 따라오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는 언더웨어가 더 이상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밖으로 자연스럽게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몇 안 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언더웨어를 패션 상품으로 개발했고, 이런 그의 의중은 적중했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유니폼’인 캘빈 클라인을 입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캘빈 클라인 언더웨어는 바로 섹스라는 기호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광고 1~8>

‘원초적 본능’으로 정상에
캘빈 클라인은 향수로 더욱 유명세를 탔다. 시대 흐름이나 이슈에 부합해서 가장 트렌디한 향수를 개발할 뿐만 아니라,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광고 비주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85년에 출시된 옵세션(obsession: 강박관념)은 아마도 캘빈 클라인 광고 역사상 가장 외설적인 시비에 휩싸인 작품을 선보여 또 한번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다. 성행위를 연상할 수 있는 그림이거나 전라의 모델들이 엉겨 있는 모습들은 일대 충격이고 사건이었다. 특히 아직 소녀의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케이트 모스(kate moss)를 전라의 모습으로 기용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광고 14>.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신호에 불과했다. 섹스 장면을 그대로 연상케 하는 후속 광고들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광고와도 차원이 달랐다. 대개 섹스어필 광고들은 소비자들로 하여금 관음증을 유발하게 하는데, 이 광고들은 그 정도를 훨씬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저속하지 않고 한 편의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이런 반응과는 무관하게 <광고 15~17>은 너무 야하다는 이유로 광고 게재거부 소동까지 일어나는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이러한 과감하고 파격적인 시도들은 역시 매스컴으로부터 질타를 받기는 했지만, 캘빈 클라인의 인기에 발목을 잡지는 못했다. 특히 옵세션 광고는 에로티시즘이 예술로 승화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이에 1989년에는 미국인 2만 4,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가장 좋게 기억되는 인쇄광고’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으며, 이후 4년 연속 기억률 1위 광고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다른 광고와 달리 포르노그래피에 해당하는 비주얼이지만, 추하지 않고, 여자들이 남자들의 성의 노예로 보여지지 않으며, 그 자체로 감상하고 싶은 예술 작품으로 느껴지도록 만들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이 광고에 대해서 캘빈 클라인은 “광고는 나의 즐거움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느 정도 옵세션(강박관념)이지만, 고백하건대 광고를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이 즐겁다. 세상 사람들이 내가 행하고 있는 이 에로티시즘을 포르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세인들의 부정적인 평가에 쐐기를 박았다.
그는 88년에는 켈리와의 두 번째 결혼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eternity를 선보였다. 그런데 아마도 기존 캘빈 클라인 광고와 어프로치가 180도 다른 것은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된다<광고 18~20>.
94년에는 유니섹스 향수인 ck one이 은은하고 부담 없는 녹차향 향수로 출시되어 전세계에 또 한번 캘빈 클라인의 이름을 부각시켰는데, 특히 이 제품은 최초로 유니섹스 향으로 개발되어 전세계 연인들로 하여금 커플 향이라는 개념으로 사랑을 받았다. 또한 98년에 자기 이름을 브랜드에 걸고 내놓은 truth calvin klein은 그 향의 고급스러움으로 매니아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중이다<광고 21~23>.
 
뉴욕이 훌륭한 101가지의 이유
캘빈 클라인은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간 30억 달러에 이르는 매출을 올리는 패션 디자이너이며, 누구보다 동물적인 비즈니즈 감각을 갖춘 비즈니스맨이고, 광고를 가장 잘 이용한 이미지 메이커로, 그와 견줄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광고인은 “광고 속의 섹스는 20분 안에 죽는다”고 선언적으로 말했다. 20분 안에 기억 속에서 사라질 뿐만 아니라, 섹스는 기억하더라도 브랜드는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캘빈 클라인의 광고에서는 철저하게 예외의 법칙으로 존재하고 있다. 많은 소비자들은 한번만 보는 것으로 브랜드를 기억했고, 결국은 지갑을 열 수밖에 없는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캘빈 클라인의 견해는 단호하다.
“유능한 크리에이터들과의 작업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킨다. 광고의 경우 언제나 그렇다. 무엇인가 관능적인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 우리는 항상 마지노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은 누구라도 위험한 선을 따라 걷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 그는 언제나 광고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마지노선을 표현했던 것이다. 광고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놀라움이나 차별화가 없으면 잊혀진다는 속성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기존의 모든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도발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하고자 했던 캘빈 클라인의 전략은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그대로 적중하며, 1984년에는 <뉴욕 타임스>가 뽑은 ‘뉴욕이 훌륭한 101가지 이유’의 리스트에 등재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그가 시도한 수많은 광고들은 일종의 스캔들 기법으로, 광고가 집행되자마자 바로 사회적 핫이슈로 대두되었고, 뉴스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광고 24~28>.
앞서 언급한 대로 대부분의 회사들은 이런 소비자들의 저항과 언론의 까발리기식 비판에 힘없이 쓰러졌지만, 캘빈 클라인은 오히려 그 힘으로 정상의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한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